"당신은 지금 거지 같은 서울역에 계신 것 같습니다."
지난 6월 말이었다. 버릇처럼 페이스북을 열었더니 위와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페이스북, 이거 귀신이네. 내가 서울역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거기다 '거지 같은'이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지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마음에 안 들었다. 마치 지금 내가 노숙인을 만나고 온 것을 아는 것처럼, 노숙인을 비하하는 투로 '거지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쓴 것 같아서다. 당장 페이스북에 전화해서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나중에 알아 보니 누군가 위치 연동으로 서울역에 관한 설명을 그렇게 넣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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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6월 초부터 서울역에서 노숙인을 만나는 '아웃리치'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일은 오후 7시 반부터 오후 11까지 진행된다. 오후 10시 반부터 11시까지는 당일 노숙인과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기록하고 집으로 간다. 집에 오면 거의 오전 0시(자정)다.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무거워서인지 쉬 잠이 오지 않는다. 무엇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을까?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해 봤다. 내 눈에는 하늘이 아니라 천장이 보인다. 갑자기 안도감이 들었다. 오늘 만난 노숙인들은 천장이 없는 곳에서 잔다. 그것도 매일매일.
안도감은 곧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아침이 되면 씻고, 밥 먹고,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어딘가로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이 모든 일을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이것도 행복이라면 행복인가.
한편으로 나도 노숙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안전망은 아직도 사각지대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청각장애를 가진, 나이가 많은 여성이다. 이 세 가지 조건만 가지고 있어도 취업은 쉽게 되지 않는다. 취업이 되지 않으니 생계가 힘들다. 통장에 있던 잔고가 바닥난다. 제1금융권에서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쉽게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제2, 혹은 제3의 금융권에게 빚을 진다. 빚을 갚지 못해 쫓겨 다닌다. 매월 내야 하는 임대료를 내지 못한다. 결국 집에서 쫓겨난다. 이렇게 되면 노숙인의 삶은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주거는 기본권인데... "임시 주거? 절차 까다로워서 안 해"
거리에 계신 분을 만나 상담하는 아웃리치 활동가
▲ 거리에 계신 분을 만나 상담하는 아웃리치 활동가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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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세 번, 밤에 서울역 광장과 지하도를 돌아다니며 그분들을 만나서 묻는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날씨가 더운데 여기서 주무시지 말고, 응급대피소에서 주무세요."
"대피소보다 여기가 편해. 대피소에 가면 사람들 코 고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 에어컨을 틀어주는 건 좋은데 이불도 안 줘. 차라리 밖에서 자는 게 세상 편해."
"그러면 임시주거를 제공해 주는 서비스가 있는데 상담 한번 받아 보시는 건 어때요?"
"임시 주거, 그거는 절차가 까다로워서 안 해."
인간의 기본권 중 하나가 주거권이다. 주거권이 보장되지 않는데 어떤 의지가 생기고 어떻게 탈 노숙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임시주거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다. 첫 번째는 임시주거 서비스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을 우선순위로 한다. 두 번째는 임시주거 서비스를 받는 이유가 명확해야 한다. 임시주거를 왜 받으려고 하는지, 받아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계획해야 한다(집이 필요한데 무슨 이유와 방향성이 필요한가. 인간에게 의식주는 기본 중의 기본으로 갖춰야 하는 조건인데).
하지만 스스로 계획을 세우기 어려울 때는 실무자가 도와주기도 한다. 이 서비스의 문턱이 그리 높지는 않은데 의외로 서비스에 대한 욕구가 크지 않다. 어쩌면 의지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오랜 기간 노숙을 하다 보니 생활의 리듬을 바꾸는 것이 두렵기도 할 테고.
노숙인을 보호하고 그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서울시의 목표는 무엇일까? 현행 노숙인정책은 '응급구호방⋅일시보호시설→자활시설→탈노숙' 또는 '응급구호방⋅일시보호시설 → 재활시설 → 자활시설 → 탈노숙'의 과정을 통해 노숙인을 사회에 복귀시키는 데 목표가 있다(박은철, 노숙 진입서 탈출까지 경로 분석과 정책 과제, 요약 1쪽, 서울 연구원, 2015.). 종국에는 노숙인을 지역사회에 복귀시켜 건강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노숙인이 지역사회에 복귀하여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웃리치 활동을 3년 정도 해오신 선생님에게 물었다.
"꽤 오래 아웃리치 활동을 해 오신 것 같은데, 활동하시면서 가장 속상하고 안타까울 때는 언제예요?"
"우선, 노인이거나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분들이 부양의무자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을 받을 수 없을 때 마땅히 도움을 드릴 방법이 없다는 점이 안타까워요. 그다음은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의 노숙 문제예요. 그분들은 휠체어를 타기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워 임시대피소를 이용할 수도 없고, 임시주거 서비스를 받고 싶어도 대부분의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언덕에 있어서 쉽지 않죠.
만약에 운 좋게 임시주거 서비스를 받을 집이 생겨도 혼자서 지낼 수 있는 상황이 안되죠. 그래서 다시 거리로 나오고 거리에서 생활하다가 아프면 다시 요양원에 가고, 이 경우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아는 분이 결국 그러다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럴 때 참 안타깝죠."
나는 아직 초짜 아웃리치 활동가라서 위에서 말한 분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하지만 얘기를 들을수록 문제가 심각해 보여서 계속 물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네요. 부양의무자 문제와 장애인 노숙문제, 시급히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아직은 갈 길이 멀죠. 거기다 대부분은 알코올중독인 분들인데 그분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한계가 있죠.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네, 알코올중독인 분들은 술을 못 끊어서 노숙인 지원 체계 안에서 보호를 못 받아요. 거의 술에 취해 있어서 상담이 불가능하죠. 거기다 시설, 병원치료도 본인이 거부하면 강제 입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안되니까요. 복수가 차고 치매가 오고 위중해졌을 때 겨우 병원에 입원해 응급치료를 받죠. 그러다 결국 돌아가시고요. 제 생각엔 앞에서 말한 부양의무자 문제는 부양의무제를 하루빨리 폐지해야 하고, 장애 노숙인의 문제는 장애인 지원주택이 도입되어야 하며, 알코올중독 노숙인의 경우에는 조절 음주를 허용하는 지원주택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얘기를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이 일을 왜 하는 걸까? 스무 명이 넘는 아웃리치 활동가들은 말한다.
"가족도 없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 노숙인에게 굳이 왜 노숙을 벗어나게 해야 하는지 동기를 부여하기가 제일 어렵다."
용산역 '텐트촌' 보고 충격... '일단 살리고 보자'로 끝날 문제 아니다
노숙생활을 탈출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개인적으로는 중독⋅질환의 치료, 자활 의지·욕구, 가족·친지관계의 회복, 생활기술의 획득, 사회생활의 적응, 부채문제의 해결 등이 있고 사회적으로는 공공부조 및 지원에 관한 정보의 획득, 안정적인 일자리 지원, 주거지원 및 유지, 지역사회에 재진입, 취업⋅경제활동 등이 그것이다(박은철, 같은책, 요약 3쪽.).
노숙인을 심층 면접조사한 결과에서는 저렴한 '주택확보'가 가장 큰 욕구라고 한다. 그렇다면 공공임대주택, 민간임대주택, 임시주거비 등의 주거지원 조건을 좀 더 완화해서 제공하는 것도 탈노숙 목표를 더 빨리 달성하는 지름길이지 않을까.
약 두 시간가량 서울역을 돌며 한분 한분을 만나, 건강은 어떠신지를 묻고 적절한 서비스가 있음을 알려드린다. 특히 외로움을 많이 타는 분들에게는 말벗을 해드린다. 절박한 사정을 듣고도 바로 해결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는 내용을 인트라넷에 적는다. 그런데 주간에 활동하는 실무자들과 연계가 잘되지 않을 때는 속이 상한다. 절박한 저분들의 요구를 외면하는 것 같아서.
탈노숙으로 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지속적인 상담과 관심이 필요하다. 실무자와 아웃리치 활동가가 긴밀하게 연결되면 좋은데 그러기에는 복잡한 과정이 있다. 활동가는 한시적으로 활동하고 실무자들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 외에도 많은 일을 한다. 목표는 탈노숙인데 탈노숙으로 가기 위한 지난한 과정은 쉽지 않다. 탈노숙보다 "일단 살리고 보자"는 위기대응이 목표가 될까 봐 살짝 걱정된다.
잠시, 딜레마에 빠졌다. 살리는 게 중요한가, '어떻게' 살게 하는가가 중요한가. 굶기지 않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게 하고 응급치료를 해 주는 것으로 그친다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얼마 전, 한 언론에서 "노숙인들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는 추세", "도서관 시민청 등 공공시설 곳곳에서 출몰"을 헤드라인으로 뽑은 기사를 보았다. 노숙인도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국민이고 엄연한 시민이인데 꼭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 했을까? 마치 도심 한가운데 멧돼지가 출몰해서 무고한 시민들이 피해를 봤다는 맥락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노숙을 하는 분들의 대부분은 노숙생활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말 못 할 사연이 있고 뭔가 꼬인 게 풀리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그 생활로 접어든 것이다. 그 상식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나와 다르게 산다고 배척하고 혐오감을 조성하는 요인으로 낙인 찍는 사회를 보며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장에서 외친 민주주의가 공허해지는 순간이었다.
용산역 텐트촌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 용산역 텐트촌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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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 계신 분들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노숙을 한다. 나는 주로 서울역 광장과 지하도를 돈다. 얼마 전에는 용산역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도 서울역처럼 광장을 중심으로 노숙인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용산역 옆에는 구름다리가 있고 그 밑에 나무가 우거진 인적이 드문 곳이 있다. 그곳에 텐트를 치고 무허가촌을 이루며 사는 사람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었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할 정도로 믿고 싶지 않은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때는 한여름, 나무덩굴이 우거지고 재활용 쓰레기더미가 쌓인 곳이다. 물은 나오지 않고, (무허가촌이라) 밤이 되어도 전기를 쓸 수 없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다. 그곳에서 모기와 씨름하며 살아가는 그들, 그들도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이라는 사실에 목이 멘다. 텐트촌 입구에는 주민들이 '건의(요구)사항'을 적는 화이트 보드가 있다. 어느날, 그 보드에 적힌 글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발 모기약 좀 주세요."
"니들은 모기약 집에서 안 쓰냐?"
오늘도 '거지 같은 서울역'을 서성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그 절망을 안고 집으로 간다. 집이 없는 그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간다는 게 미안하지만 그나마 위안이 된다면 이율배반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