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노숙인들, 술병 대신 빗자루 들다
작성자 김형준
추석 연휴가 끝난 19일 오전 7시쯤 서울역 광장 시계탑 앞에 노숙인 1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하나씩 들고 흩어진 노숙인들은 광장 곳곳을 돌면서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와 빈 막걸리병, 소주병 등 쓰레기를 주워 모았다. 이른 아침부터 골판지 박스를 깔아놓고 소주를 마시던 노숙인 열댓 명이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슬며시 술판을 접었다. 이들은 소주병과 일회용컵, 비닐봉지 등을 가지런히 모아 청소하는 노숙인들에게 건네고 자리를 떴다.

서울역은 하루 250명가량의 노숙인이 모이는 국내 최대 노숙인 집결지다. 노숙인들과 관계된 크고 작은 사건만 1년에 3000여 건 발생한다. 노상방뇨와 배변, 술 취해 벌이는 시비와 폭행, 구걸 등 행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건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부정적인 이미지였던 노숙인들이 청소 봉사에 나서자 서울역 주변 상인과 경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울역 파출소 관계자는 "말썽만 일으키던 노숙인들이 봉사를 하는 것은 일대 사건"이라며 "앞으로도 이런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4년간 서울역 광장을 청소했다는 한 환경미화원은 "노숙인들은 서울역 광장을 더럽히는 골칫거리였는데, 스스로 청소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건 처음 본다"고 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이날 청소 봉사에 나선 노숙인들은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산마루교회 교인들이다. 산마루교회는 일반 교인이 100여 명, 노숙인 교인 역시 100여 명인 작은 교회다. 이 교회는 일요일 오전에 노숙인들만 참여하는 예배 시간이 따로 있을 정도로 노숙인 신자들에게는 유명한 곳이다. 노숙인들은 처음에는 예배가 끝난 뒤 나오는 무료 급식을 받기 위해 교회를 찾았다가 점점 이주연(60) 담임목사의 설교에 빠져들었다. 이 목사는 노숙인들을 '그분들'이라고 부르며 존중해준다고 한다. 이 목사는 "예배를 보러 온 그분들이 '출근길 서울역에 술병이 나뒹구는 건 우리도 부끄럽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며 "추석 연휴가 끝나고 엉망이 된 서울역을 본 그분들이 '우리가 나서서 한번 치워보자'고 해 봉사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20년간 서울역에서 노숙을 해왔다는 김모(59)씨는 "어디가 더러운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며 하수구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집게로 쏙쏙 빼냈다. 노숙인 이모(53)씨는 "서울역은 밤 12시까지 청소를 해도 아침 되면 말짱 소용이 없다"며 "밤새도록 술판을 벌이면서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리는 노숙인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1997년 외환 위기 때 집을 나온 황모(68)씨는 "서울역에서 쓰레기를 버리기만 했지 줍기는 처음이라 부끄럽다"고 했다. 청소에 나선 지 1시간쯤 지나자 노숙인들이 든 쓰레기봉투가 금세 불룩해졌다. 이날 총 1000ℓ 정도의 쓰레기가 모였다.

이날 노숙인들이 서울역을 청소한다는 소식에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아침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동참했다. 정 전 총리는 산마루교회가 '노숙인 교회'로 알려지자, 지난해부터 교회 급식비를 내주고 직접 배식 봉사에 참여했다. 정 전 총리는 "노숙인들이 처음에는 '정치인이 표 얻으려고 그러느냐'며 소리를 질렀지만, 이제는 자주 보니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고 했다. 이날 산마루교회를 후원하는 온누리교회 이재훈 담임목사와 신도 20여 명도 서울역을 찾아 청소를 도왔다. 청소를 마친 노숙인들은 서울역 파출소 옆 해장국집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아침밥을 먹었다. 한 노숙인이 "우리가 서울역에서 십수 년 살았지만 여기 해장국은 처음 먹어보네요. 내 인생에서는 봉사하고 먹는 밥도 처음"이라고 말하자, 노숙인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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